사하로프 - 서부 공화국
고르바초프는 지속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1986년 12월 23일 소련 내 반체제 인사 중 가장 거물이었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고르바초프와 통화 대담을 한 후 7년간의 국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당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가장 높은 7등급을 부여받았으며 이 사고로 인해 사고 시설 주변 30km는 접근이 일부 제한 되었고 누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벨라루스-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 부근은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련의 원자력에 대한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복구 비용으로 3억 2700만 달러로 추산되는 등 재정에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1944년 소련에 강제로 병합된 발트 국가들은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정부가 중앙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는 법률을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고르바초프는 중앙유럽의 소련 통제는 많이 풀어주었으나 발트 해 지역의 분리독립은 용납할 수 없고 필요한 경우 금수조치와 무력 사용을 통해 진압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또한 정치국에선 폴라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으나 이러한 공산정권 붕괴가 소련에게까지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1986년 12월 26일 록 콘서트가 끝난 이른 아침 아트비아 노동자 300명이 리가 대성당 광장에 모여 레닌 에비뉴를 향해 행진하며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물러나라 자유 라트비아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보안군과 시위대 사이 충돌이 일어났고 경찰차 수 대가 뒤집혔습니다.
1986년 12월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가 고르바초프의 압박으로 카자흐인인 딘무함마드 쿠나예프가 러시아 SFSR 소속의 제나디 콜빈으로 바뀐 것에 반발해 카자흐 SSR 알마아타에 소요사태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는 1986년 12월 17일 아침 브레즈네프 광장 앞에서 학생 2-300명이 모여 제1서기 쿠나예프의 해임과 러시아인으로 바뀐 것에 대해 항의했으며 나중에는 다른 학생들이 시위 군중에 합류하며 1000-150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내무군, 드루지니키, 사관후보생, 경찰관 KGB 병력들을 광장으로 모여 시위대를 압박하고 녹화하라 명령했으며 그날 오후 5시엔 군대가 시위대를 해산시키란 명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날 밤 알마티엔 보안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2월 18일엔 시위대와 보안군, 자원군, 민병대 간 충돌로 소요사태로 바뀌었고 카자흐스탄 학생들은 대규모로 대치햇으며 셋째 날이 되어서야 충돌이 잠잠해질 것 같았지만 알마아타 사건의 소식이 다른 곳으로 퍼지면서 심켄트, 파블로다르, 카라간다, 탈디코르간에도 소규모 시위가 이어졌으며 카자흐 SSR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이 소요로 대략 3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선 수감자 5천명을 포함해 3만~4만명이 체포되었으며 사상자는 추측하기도 어렵다고도 하였습니다. 젤토크산 봉기 지도자는 이 시위에 카자흐인 6만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으며 카자흐 SSR 정부는 이 소요사태로 자원군 경찰과 학생을 포함해 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머리에 큰 충격으로 외상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약 100여명이 구금되었고 몇몇은 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미국 의회도서관을 인용한 소식통에서는 최소 2백명이 사망하거나 사건 이후 즉결처형 당했다고 추정하기도 했으며 이부에선 약 천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도 추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