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1당 민주주의

청락더락 2020. 3. 19. 22:07

1987년 1월 28일 -30일까지 있었던 중앙위원회 총ㅚ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사회 전역에 걸쳐 데모크라티자치야라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자고 제안햇으며 고르바초프는 향후 공산당 선거는 비밀투표를 통해 다수의 후보들 중 한명을 뽑아 선출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CPSU 총회 대표안에선 고르바초프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공산당 내에서 민주주의 이행에 대해선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골라스노스트의 확대에도 주안점을 두면서 언론 매체에 제한 없는 공개 토론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련 인텔리 계층은 그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시행할 때까지 약 1년이나 미루었으며 처음으로 공산당 지도자가 중앙위원회 국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바라는 민중의 지지를 말하며 호소했습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으며 결국 2년도 못되어 당내 보수주의자의 개혁 반대는 막히게 되었으며 정치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안은 결국 의도치 않게 개혁할 그 시스템 자체를 죽여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1987년 2월 16일 1950년대 흐루쇼프 해빙기 이후 처음으로 정치범 수십명이 사면되었으며 5월6일에는 러시아 민족주의 단체 팜야트가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위를 열었습니다. 정부는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길을 터주어 시위대가 행진하여 당시 모스크바 공산당 총수이자 고르바초프와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즉석 회담을 열었습니다. 7월 25일엔 크림 타타르족 300여명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모여 1944년 크림 타타르족의 강제 이주에 대해 항의하고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시위를 수시가동안 벌였으며 경찰과 군은 이 시위를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당해 9월10일 모스크바에 강경파 정치국원 예고르 리가쇼프가 금지되었던 시위2개를 허용시키는 내용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발언을 한 후 보리스 옐친은 흑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고르바초프에게 사임 서한을 보냈으며 고르바초프는 충격을 받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정치국원을 자발적으로 사임하겠다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10월27일 예정된 중앙위원회 본회의에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사임서에 써져 있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개혁의 속도가 너무 느리고 서기장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며 리가쇼프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옐친의 정치적 미숙함과 절대적인 무책임성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이 회의에선 그 누구도 옐친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친의 이러한 행동과 비밀스런 언변에 대해 소식이 확산되었으며 곧 이를 다룬 사미즈다트가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옐친이 소련 반대파의 수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중에게 반권위적인 이미지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투쟁은 소련 붕괴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11월 11일 옐친은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