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공화국

1988년 2월 초 시작된 몰도바의 민주 운동은 ㅗㄹ도바 민주 운동을 중심으로 시위 크기와 그 강도가 점점 커져 공공 회의 노래 패스티벌 등으로 넓혀졌으며 특히 이 시위는 키시너우 슈테판 대공 기념비와 키시너우 클래식 거리 공원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1988년 1월 15일 클래식 거리의 미하이 에미네스쿠 흉상 앞에 열린 헌화 시위에서 아나툴 샬라루는 한 제안을 발표했으며 공개된 이 제안은 국가적인 각성의 요구, 언론의 자유, 몰도바 전통의 부활, 루마니아어의 공식 언어 부활과 옛 라틴어로의 철자 회귀 등이 있었습니다. 1988년 4월 26일 카예프의 흐레샤티크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문화 클럽이 주최한 행진이 열렸으며 이 행진에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2주년을 맞이하여 500명이 모여 개방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위를 열었으며 5월에서 6월 사이 서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카톨릭교도들은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부니프, 칼루시, 호시프, 자르바니차 숲 등지에서 천여년간 기독교를 은밀하게 지켜오며 온 것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으며 6월 5일 모스크바에서 밀레니엄 공식 축하 행사가 열리면서 우크라이나에서도 우크라이나 문화 클럽의 주최로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 기념비에서 축하 행사를 가졌습니다. 당원 16일 리비우에 6천-8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29일부터 열릴 제19차 공산당 총회 지역 대의원 명단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며 항의 시위를 열었으며 21일엔 갑작스레 개정된 대의원 명단에 대해 항의로 리비우에 5만명이 모여 시위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정부는 드루즈바 스타디움 앞에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러 했고 7월7일 1만명에서 2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페레스트로이카 홍보를 위한 민주전선을 출범했으며 17일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교회 주교인 파블로 바실리크의 주최로 밀레니엄 축하 행사를 위해 자르바니차 마을에 모여 만명의 사람들과 행사를 가졌습니다. 민병대가 이 행사를 해산시키러 했으나 결국 스탈린이 종교를 금지한 1946년 이후 최대의 카톨릭교회 모임이 되어 버렸으며 8월4일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페레스트로이카 홍보를 위한 민주전선이 조직한 시위를 강력하게 금지했습니다. 이 시위 해산 과정에서 41명이 구속되거나 벌금형, 15일 구금형을 받았으며 9월1일엔 리비우 대학교에서 허가 없는 공개 모임 및 시위가 열려 정부가 학생 5천명을 체포했습니다. 1989년 봄 소련 국민은 1917년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을 선출하면서 민주주의적인 투표를 통해 제한적으로 민주화를 누릴수 있으며 입법부 숙의 시간이 공개적으로 검열되지 않은 채 TV로 생중계 되면서 소련 국민들은 그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던 공산당 정부가 심문받고 책임을 묻게 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으며 이 사례와 같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제한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실험을 하게 되면서 결국 1989년 여름 바르샤바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당해 년말까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입국 5개국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이 사건은 중앙유럽과 소련 국민이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 현대화 추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대신 중아유럽 국민들은 공산주의를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