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

청락더락 2020. 3. 29. 17:39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중앙부의 코린트에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역 그리고 여러 섬들의 모든 폴리스에서 대표를 소집하여 폴리스의 독립, 자유, 불가침, 정체 , 사유, 재산, 대차 관계의 현상태 유지를 약속하고 참가한 모든 폴리스의 연맹을 결정하여 스스로 동맹의 외부에서 연맹 의결 사항의 집행자가 되었으며 다음해 기원전 337년 제2회 총회에서 연맹의 대페르시아 보복전을 결의 동시에 마케도니아 왕은 각 폴리스가 분담 파견한 연맹군 전체의 절대 통수권자로 임명되었습ㄴ디ㅏ. 다음해 봄 선견 부대를 소아시아로 진군 시켰으나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어 알렉산드로 3세가 왕위에 등극하였습니다. 대왕은 새로 고참 정병과 종군 희망자 그리고 현지민 징모병 등으로 군대를 다시 편성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령을 평정한다는 새로운 목적을 갖고 다시 진군을 개시하였으며 7월1일 다리우스 3세가 박트리아에서 베수스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정로요지에 수많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군대는 황량한 지역을 전전하면서 3년 동안 일단 유령의 동북 지역 평정을 완료했으며 기원전 327년 초여름 인더스강 방면에 작전 개시하여 완고한 적 파우라바 토후의 항복을 받았으나 히파시스강 선에서 휘하 장병 모두가 이 이상의 동진에 반대하여 대왕은 부득이 군대를 되돌렸으며 결국 인더스강이 그의 제국 동쪽 한계가 되었으며 기원전 323년 봄 대왕은 제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돌아갔으나 돌연 열병에 걸려 동년 6월 13일 급서하였습니다.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알렉산더 휘하의 마케도니아 그리스 연맹군 3만5천명은 기원전 334년 이른 봄 소아시아에 출격하였으며 최초의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가을 이수스의 결전에서 처음으로 적왕 다리우스 3세와 사면하였으며 양군 모두 정찰대를 내지 않았고 한누에 볼 수 없는 험로에서 갑자기 맞부딪쳤기 때문에 대병력이 도리어 장애로 하여 적은 혼란중에 피해 달아났으며 왕후와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계속 쫓지 않고 페니키아 해안을 하나하나 진압하여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점령하고 전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으며 이른 봄 다리우스와 자웅을 다투려고 다시 북상하고 10월1일 가우가멜라에서 결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 해 겨울 다리우스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 불을 질러 전쟁이 완료했음을 증거로 삼고 적의 수도 엑바타나에 입성하고 그곳에서 연맹군을 해산시켰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급사에 따라 그의 대제국은 삽시간에 대혼란 속에 빠지고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은 모두가 놀라운 정력적 야심가들로서 각기 후계자 즉 디아도코이라고 주장하여 엘렉산더의 이복 동생인 필리포스 3세나 유일한 자식인 알렉산더 4세의 포섭에 열을 올리는 동시에 제국의 유토 쟁탈을 위해 서로 할거하면서 왕을 자칭하여  대왕이 죽은 후의 40년 동안을 안정될 줄 모르는 상쟁과 흥망의 역사가 되풀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