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17세기 유럽 역사

청락더락 2020. 4. 3. 12:47

절대주의 시대에서는 봉건적 대토지 소유자인 영주의 세력이 점차로 쇠퇴해 가고 있어 농업이나 공업에서 소부르주아적 생산자가 대두하고 있으며 국왕은 봉건 영주의 약체화에 대응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농민 수탈의 여러 권리를 자기 수중에 집중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면서 국민적 통일국가의 실현을 꾀하고 있으며 국왕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팽대한 관료 기구와 국왕 직속의 상비군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비용은 왕의 광대한 영토로부터의 수입, 중왕 집권화된 지대로서의 ㅣ지조 그리고 그 위에 신흥 신민계급인 상인과 공업인에 부과한 세수입에 의하여 잘 처리되었습니다. 이처럼 절대주의의 재산적 기초는 여전히 봉건적 토지 소유 위에 한쪽 발판을 두면서 동시에 신흥 시민계급의 경제적 부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왕의 영지에서 수입이나 지조 수입이 고정화되어 옴에 따라 상공업자의 부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한층 굳어지고 있었으며 경제발전은 궁정을 중심으로 한 국왕의 생활을 점점 사치스럽게 하고 여기에 더하여 국왕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되풀이되는 대외전쟁은 국가 재정을 핍박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한때 국왕의 권력은 봉건적 세력에 의해서도 간석되지 않고 시민계급 또한 왕권을 통제할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왕권의 전국민적 이해를 대표한 듯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 절대주의가 성립한 것은 1485년 튜더 가의 헬린 7세에 의하여 영국이 통일된 이후의 일이며 백년전쟁 및 그 후의 내란에 의하여 봉건전 대제후는 쇠퇴하고 여기에 따라서 국왕의 권력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헨리 7세는 정치적 통일을 완성한 후 도량형을 제정하여 국내 통상의 편리를 도모하고 공업 노동자의 임그밍나 노동 시간을 규제하여 외무 무역의 촉진을 도모하는 등 국가 재정을 강화하는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헨리 8세는 이들 정책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다시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로마의 세력을 구축하고 수도원 재산 몰수에 의하여 잿정의 강화를 꾀했습니다. 그리하여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최성기를 맞이했는데 이 무렵부터 시민계급과의 사이에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제임스 1세 시대에는 왕권과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의회의 대립이 격화하고 찰스 1세 때에는 이 대립이 폭발하기에 이르러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잉글랜드 내전은 잉글랜드 오아국의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있었던 내저닝며 1642년에서 1646년까지 있었던 첫 번째 내전과 1648년에서 1649년까지 있었던 두 번째 내전은 찰스 1세의 지지자들과 의회파 간의 내전이었고 1649년에서 1651년까지 있었던 세 번째 내전은 찰스 2세의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내전이었으며 1651년 9월 3일에 우스터 전투로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내전의 결과 찰스 1세는 처형되었고 찰스 2세는 추방되었으며 의회파는 잉글랜드 연방을 구성하여 1653년에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선출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전은 영국 정치에서 의회가 군주에 대항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고 이후 1688년에 일어난 명예 혁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