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맹회 결성 및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쑨원의 흥중회를 비롯하여 화흥회, 광복회 등 여러 혁명단체들이 통합하여 혁명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나타냈으며 1907년 7월 혁명의 선구자 쑨원이 유럽에서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움직임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쑨원은 혁명의 동지 황싱과 혁명 제단체의 연합을 제창한 끝에 호응을 얻었으며 대표들은 쑨원을 주석으로 추대할 것 새로 결성되는 단체의 이름은 중국동맹회로 할 것 쑨원이 제창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 인물로는 쑨원, 황싱, 장병린 등이 있으며 그들은 1906년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후의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중국동맹회는 본부를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의 8개 지부를 두도록 했으며 국내에 5부 즉 상하이에 설치한 동부는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 성 3개 성을 관할하며 충칭에 설치한 서부는 간쑤성, 쓰촨성, 티베트, 신장, 구이저우성 5개 성을 관할하고 홍콩에 설치한 남부는 푸젠성, 광둥 성, 광시, 윈난성 4개성을 관할하고 연대에 설치한 북부는 산둥성, 산시성, 섬서성, 몽골, 즈리성, 동삼성의 8성을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신해혁명은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 지식인 뿐만 아닌 여러 단체에 참가한 일반 군중들, 해외 화교, 신군 병사, 신사층, 농민 등 폭넓은 계층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었습니다. 신흥 지식인들은 해외에서 신지식을 배운 유학생과 신식 학당에서 배운 학생이 주체였으며 과거제도 폐지 후 청조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 함과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했습니다. 타오청장의 제창 아래 서석린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해 최신의 군사 교육을 받아 귀국했습니다. 1900년대 청조에서는 일본 유학열이 높아져 신해혁명 직전에는 수만명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의 주변에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는데 1905년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성립했을 때 90% 이상의 회원이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들이었습니다. 일본 유학학 학생들은 신해혁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자 쑨원을 비롯해 황싱, 쑹자오런, 후한민, 왕징웨이 등 혁명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 망명객 내지는 유학의 경험자였습니다.
해외 화교도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해외 화교는 해외 각지의 거주지에서 동맹회에 대한 자금 원조를 지원해준 것과 동시에 귀국후 출신지에서 혁명 단체를 조직 많은 무장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1894년 11월 쑨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중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20명의 화교가 참여했으며 황화강 봉기 당시 죽은 72명의 열사 가운데 해외 화교가 29명을 차지하는 등 많은 화교들이 혁명활동에 참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