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청조의 대응과 위안스카이의 등장

청락더락 2020. 4. 28. 15:57

우창 봉기에 이어 호남, 섬서, 강서, 산서, 상하이, 절강, 광둥 등 여러 지역에서 동맹회 회원들이 우창 봉기에 자극받아 일제히 봉기하여 11월 하순에는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 독립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으나 이들의 혁명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서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습니다.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베이징의 청조에선 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10월11일 오후에 알게되었으며 당황한 청조는 그 이튿날인 10월 12일 우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으나 패전의 책임을 서징에게 전가하고 철도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전부 대신 성선회를 민란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습니다. 

청조는 그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토록 명하였으나 위안스카이 자신은 청조에서 다시 부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꾀병을 내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청조 내각에서는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 혁명군을 진압하자는 논의를 가졌는데 청의 황족가운데 일부는 위안스카이를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고 비난하면서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해 위안스카이를 부르는 것을 반대했으나 청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청조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있던 고관들을 파직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혁명파를 진압하기 위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청조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려했던 이유는 혁명군 토벌을 명령받은 음창과 살진빙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청 정부로서는 봉기를 일으킨 혁명군을 진압할려면 최정예부대인 북양 신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돤치루이, 펑궈장 등 북양 신군의 고급 지휘관들이 위안스카이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위안스카이는 북양신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자였습니다. 10월27일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고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호북반란 진압군과 양자 강 해군을 총지휘하게 했으며 11월 1일에는 내각총리인 경친왕 혁광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이 됐으며 순칭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로 섭정에서 물러나야햇으나 11월 3일에 청조는 헌법신조 19조를 발표하여 황제의 대권을 대폭 삭제하여 헌법에 규정된 권한만을 갖게 하고 황족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위안스카이는 내각총리로 청나라의 군정대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호북의 혁명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