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왕위를 계승한 이래 프랑스, 에스파냐와의 잦은 전쟁으로 그 비용을 강제 기부나 상납금 등에 의존하였으며 이러한 약정으로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어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에게 청원이라는 형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리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세 승인을 필요로 한 찰스 1세는 마지못해 재가했으나 1629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정치를 단행하여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청교도 혁명에서 크롬웰은 대간의서를 제출하고 국민에 대하여 의회의 정당성을 호소하려 했으며 찰스 1세는 의회를 탄압할 것을 결의하고 핌, 함프덴 등 5인의 의회 지도자를 반역죄로 고발하고 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습격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찰스 1세가 의회를 습격한 이래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은 결정적으로 뚜렷해지고 제각기 결전을 위하여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롬웰은 왕을 처형한 후 수평파 디거스를 탄압하고 제5오아국파 하리돈과 힘을 합쳐 지명의회를 조직하고 성자의 정치를 꾀했으나 곧 의회도 해산되자 1653년 12월 통치장전을 수락하여 호국경의 지위에 올랐으나 1654년 열린 의회는 군대와 충돌하여 다음 해 1월 해산하자 크로무엘은 민병제를 개편하고 군정장관에 의한 군사독재를 실행하게 되었으나 유산 계급은 왕정 복귀를 원하여 크롬웰을 왕위에 앉히고 군대를 의회의 재정적 지배하에 둔다고 하는 탄원과 청원을 제출하였습니다. 크롬웰의 즉위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군정장관 등의 군인가족은 의석을 얻은 대가로 매수되었으며 통치장전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크롬웰은 죽고 그 아들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그는 군대와 의회와의 대립을 누르지 못하였습니다.
의회파는 크롬웰의 신형 군대의 활약에 의하여 네스비에서 왕당군을 격파하고 1646년 4월까지 전 잉글랜드를 지배 아래 두었으며 왕은 스코틀랜드군에게 잡히고 영국 측에 인도되었으며 제 1차 내전이 종료된 후 의회 내부에서도 국왕과의 타협을 의도하는 장로파와 혁며을 철저하게 수행할 것을 부르짖는 독립파의 대립이 생겼으며 장로파는 대부르주아지와 귀족을 중핵으로 하고 있어 입헌군주제 아래에서 자기 이익을 확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독립파는 하층의 병사나 하사관이 급료의 지불 지연이나 유족의 사회 보장 불충분에 불만을 품고 차차 수평파의 사상적 영향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사관과 병사들은 군 간부를 부추겨서 국민의 군대를 해산시키려 했던 장로파와 대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사이에 유폐되어 있던 국왕은 스코틀랜드와 연합하여 제2차 내전을 일으켰으나 즉시 진압되었고 독립파는 의회에서 장로파를 추방하여 독재 체제를 만들어 1649년 왕의 처형과 왕제의 폐지를 결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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