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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명예혁명

by 청락더락 2020. 4. 3.

제임스 2세가 3년의 재위 기간 동안 두가지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하나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권신수설에 대항하는 의회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로마 가콜릭을 신봉하였고 의회와 갈등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679년과 1681년에 신학적으로 저교회파 성공회 신자들의 정당인 휘그당은 추방 결의를 통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신학적으로 교회전통을 강조하는 고교회파노선 성공회신자들의 정당인토리당을 지원하였고 1685년 즉위하여 왕정의회를 다수 토리당원으로 채웠습니다. 제임스 2세는 토리당의 견해를 무시하고 종교적 관용을 내세워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관리로 채용하였으며 심사율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이러한 정책은 토리당에게 잉글랜드 교회의 붕괴로 비쳤으며 1687년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신봉하던 로마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이외의 개신교인들, 비국교들과 연합하여 양심의 자유 선언을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이를 통해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억압을 철폐하려 하였습니다. 

1686년 제임스 2세는 국왕 법정을 개최하여 로마 가톨릭의 관료 기용을 제한하는 심사율의 폐지를 강요하여 영국 성공회의 런던 주교이자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 반대자인 핸리 콤프튼을 퇴위시키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맥달런 컬리지의 개신교도 교직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로마 가톨릭 신도로 채웠으며 제임스 2세는 많은 로마 가톨릭 신도를 상비군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는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제임스 2세의 전횡이었습니다. 하운슬로우에 3만 4천여 명의 상비군을 주둔시켰으며 1688년 제임스 2세는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이를 거부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6명의 주교를 수감하였으나 공개 재판에서 런던의 군중들은 그들에 대해 무죄를 외쳤습니다. 1688년 4월 제임스 2세의 아들이 태어났고 개신교도였떤 딸 메리의 왕위 계승을 기대하던 개신교도들은 브리튼 제도에 가톨릭 왕국이 세워질 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던 토리당과 휘그당은 동맹을 맺고 국왕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은 1년여에 걸쳐 영국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엿으며 1687년 4월그의 사절을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하였으며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만약 전제정치에 반대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왕족의 권리를 사용하여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윌리엄이 새로운 가톨릭 왕위 후계자 때문에 늦어도 11월까지 영국을 침공하기로 협약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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