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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18세기 역사

by 청락더락 2020. 4. 3.

중세의 기독교적 이념은 합리주의와 17세기 고전정신의 조화 앞에서 물러갔고 이 이념은 계몽주의 사상이라는 18세기의 지적 운동의 충격을 받고 더욱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이 노력하면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을 토대로 하며 서양사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되어 인간생활의 세소고하는 이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게 됩니다. 기성종교 특히 기독교는 이성의 시대의 일관한 도전에 직면하여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며 계몽주의의 씨앗은 영국에서 뿌려져 거기서 싹이 돋아났으나 꽃이 핀 것은 프랑스에서 입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계몽주의 운동의 약점을 드러낸 점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1776년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천명하고 독립 이어서 이러한 원칙을 최대한 정치에 응용함으로써 커다란 진보를 이룩하였으며 프랑스 대학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계몽주의 운동의 좌절이요 이성의 효능이 그 한계를 명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 같은 군인에게 정권을 제공하였으며 1799년의 쿠데타를 통해 나폴레옹이 이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계는 다시 시련 속에 빠져들어갔으며 18세기는 혼란 속에 저물어갔습니다. 프라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전형적인 계몽적 전제군주라 하며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기습했고 7년 전쟁을 통하여 프러시아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으며 폴란드를 분할하여 프러시아 왕국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바리아 계승 전쟁에선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의 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위대함은 그의 군사적 성공에 있다기보다는 계몽주의적 이념을 십분 호흡하여 이른바 선의의 전제 군주가 됐다는 사실에 있으며 마리아 테리지아도 국민 사이에 덕망이 높았으며 빈이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도 그의 치하에 이루어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걔몽주의 사상은 점차 과격한 면을 드러내게 되어 루소는 이성 만능의 풍조에 반발하고 낭만주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강희제와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 3대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영토도 중국 사상 최대의 제국으로 확대하엿으며 18세기 전반의 지정은제에 의한 세재의 획기적인 진보와 한인을 함께 등용하는 행정체제로 중앙집권 체제는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의 현저한 향상과 농촌 공업의 발달도 내외의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청조는 해외 무역을 엄격한 통제하에 두고 오직 공행이라는 관허상인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였으나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의 수출무역은 대단히 성하여져 대량의 외국 은이 유입되어 화폐경제의 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거대한 상업자본의 활동을 촉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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