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으며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습니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으며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으며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우러의 일이었습니다.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의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으며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여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으며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습니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 순경교련소 그리고 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 이준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으며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하강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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