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는 1898년 이래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 등 막대한 이권을 외국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 시기 철도 부설 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나 민간에서 이권 회수 운동이 일어나 철도도 스스로 자금을 마련해서 부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나 호남, 호북, 쓰촨, 광둥에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이 일어나 주식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자금에는 한계가 잇었기 때문에 철도 부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11년 5월에 청 조정은 신정의 일환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13명의 각료를 임명했으나 문제는 이 13명의 각료 중 한족 출신은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내각인사였으며 더 커다란 문제는 이 내각에서 우전부대신 성선회가 철도를 국유화 하여 국가에 건설하자고 건의하여 청조정은 즉각 철도 국유화령을 내렸습니다. 건설이 예정된 쓰촨에서 한커우 그리고 한커우에서 광저우 간 철도를 정부가 외국의 차관을 얻어 건설할 것이며 이미 사업에 투자한 민간이들에게는 공채를 발행해 보상해 준다는 것이었으며 이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미 판매한 주식 대금에 대한 보상이었는데 보상할 능력이 없었떤 정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철도 건설이 완성된 다음에 보상해 주기로 하였기 때문에 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청조의 이러한 조처는 결정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격분시켰으며 우선 내각이 의회에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사항이었고 정부가 약속한 민주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만주족이 독점한 내각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정서에 크게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이미 투자한 민간인들의 이권을 박탈하는 조처였습니다. 피해를 입은 지역 가운데 호남 장사에서 처음으로 국유화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으며 또 조세에 항거하자는 상인의 철시와 동맹휴학도 일어났고 그 이후인 6월17일 보로동지회가 조직되어 호북과 양광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제일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쓰촨 성이었습니다. 쓰촨성의 주요도시인 성도에 쓰촨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주현에 분회를 조직하고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쓰촨성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므로 철도의 민영화를 건의하여 입헌파로부터 찬양을 받았으나 성선회 등으로부터 질책받고 조정의 강경책이 나오자 태도를 바꾸어 그 때까지 취했던 완화정책 대신에 적극적인 진압 정책을 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압하는 군대가 군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20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터졌고 이는 후에 1911년 9월 무장폭동으로 번졌으며 쓰촨성 총독 조이풍은 성도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쓰촨성 전 지역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저지시키려고 하엿으나 이 때는 이미 쓰촨 혁명당이 조직한 보로동지군이 성도를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또 10여주와 현을 점령하고 잇어서 그 기세가 강해 청나라는 진압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청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각 성에 연라갛여 쓰촨성에 진압할 군대를 파병했으나 진압군대를 이끌던 단방이 쓰촨성의 자주에 이르렀을때 그가 이끄는 호북 신군이 그를 살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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