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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by 청락더락 2020. 4. 6.

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습니다.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으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 약법, 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하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부터 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2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로 했습니다.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1908년 10월 안휘성에서 신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르며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을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와 재순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으며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으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습니다.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리고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고 봉기는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르며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의 책임자 조성은 어렵게 탈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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