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하였으나 의호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그리고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으며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상신하라고 명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신정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자희를 따 자희신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부 주도하에 이뤄진 개혁 중 최요하고 시급한 개혁이 교육이었으며 청조는 국외 유학을 장려하고 전국의 학당을 신식 학교로 바꾸도록 하여 점차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이었던 재래식 학당이 신식 학교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교육 개혁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기하급수로 학교 수와 학생 수는 늘어갔지만 정작 가르칠 신식 교사는 태부족하여 전체 교사의 반이 신식 교육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구식 교원들이었습니다.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간판만 바꿔 단 과거 학당이었고 그 설립자나 운영자는 거의 신사층 즉 향토 지식인으로 이들은 근본으로 과거 제도 폐지를 반대하여 신식 학교의 설립도 국외 유학도 반대해 왔던 세력이었습니다.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학당 존재가 위험해져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학당을 신식 학교로 개조해 교묘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외양만 바꾸었지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 허울 좋은 교육개혁이었을 뿐 신식 학교도 과거 준비라는 과거 기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조는 1905년 과거제도를 완벽히 폐지하였으나 청조가 시행한 교육개혁은 여러 한계점이 속속 드러났는데 예컨대 신식 학교로 바뀌긴 했어도 가르치는 내용에 과거 교과가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과 학업의 기본이 유학이었고 일주일 수업시간 30시간 중 12시간을 유교 경전 핛브에 할당했을 정도 였으며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고 중국어의 순수를 유지하려고 외래어 사용을 일절 금하였으며 여성 교육도 금지되어 있다가 러일전쟁 후 1907년이 되어서야 허용되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으로 교육하려는 학교가 대대로 늘어나고 과거 시험 준비 학당이 마지못해 신식 학교로 변신하긴 했어도 청조는 개혁의 본의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으며 결국 청조의 교육개혁은 실효가 전무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도어 청조를 성토하고 열렬히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서 중국인 유학생들 간에서 청조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목소리가 고조됐고 일본 내 중국 유학생 단체들이 반청과 공화 혁명 주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조는 사농공상 신분 차별에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잇단 전쟁 패배와 군대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군사 개혁을 서둘러 착수했습니다. 청조가 신군을 조직하고 군사제도 개혁을 착수한 결과 군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져 무관의 위상이 문관과 동등해질 징도로 높아졌으며 일본에 파견된 군관들은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널리 퍼진 혁명 사상에 영향받아 후일 공화 헉명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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