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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쓰러져 가는 청나라

by 청락더락 2020. 4. 6.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으며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간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으며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동치중흥이라고 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습니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1899년-1900년 기간 산둥 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하며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며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99년 산둥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특히 기독교도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습니다. 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고나을 공격했으나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으며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으며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의 개혁주장이 과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볍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마련에 착수하고자 했으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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