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으며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는 황실에 상주했으며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습니다. 청 조정은 1905년 7월 헌정시찰단을 유럽, 미국, 일본에 파견했고 1906년 9년 뒤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상유를 선포했으며 1908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을 공포하여 9년 후에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흠정헌법대강은 일본 제국의 메이지 헌법을 모형으로 하여 황제의 만세일계와 신성불가침, 황제의 광범위하고 강대한 권한을 규정했으나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08년 11월 14일에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가 죽었습니다. 서태후는 당일로 광서제 조카로 나이가 3살밖에 안 된 푸이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그 다음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급사했습니다. 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이며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하고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햇으나 거절당하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되었습니다.
중국 공화 혁명의 시초는 1894년 쑨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미주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지밀결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으며 쑨원은 다음해 1895년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을 동원해 광주를 무장으로써 점령하려는 최초 반청 봉기를 계획햇으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후 망명했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었습니다.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상으로 저명해졌고 억류에서 석방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며서 산민주의 사상 기초를 닦고 1897년 전후로 쑨원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와이, 베트남 그리고 타이와 싱가포르를 순회하면서 화교와 유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봉기하려는 자금 모금에 나섰습니다.
이 저항운동이 청조 탄압 탓에 실패한 후 일본 유학생계에는 혁명 운동 기운이 본격으로 싹텄으며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 반청 혁명단체인 화흥회와 광복회가 뒤에 성립되었으며 종래 반제국주의의 선전이 반청 혁명을 집중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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